“승객을 탈출시켜야 한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승객을 탈출시켜야 한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침몰하는 세월호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이 사고로 304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됐다. 이 중 248명이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이었고, 10명은 단원고 선생님이었다. 일반인 승객은 41명이었다. 모두 172명이 살아남았다. 단원고 학생 75명과 선생님 3명, 일반 탑승객 94명이 구조됐다.

이 사고는 전국에 실시간으로 방송됐다. 학생들과 탑승객들이 목숨을 잃는 과정이 전부 보도됐고, 기자들은 유족들이 슬퍼할 틈도 없다는 듯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만큼,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어떻게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희생됐는지, 그래서 누구의 잘못인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2014년 그토록 많은 국민이 슬퍼했지만, 현재 학교에 다니고 있는 2007년생부터 2018년생까지 대부분 학생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현재 고등학교 3학년은 세월호 참사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현재 초등학교 1학년은 참사 당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런 세대들에게는 세월호 참사가 먼 과거의 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청소년에게 세월호 참사는 잊혀지고 있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그러나 잊혀지고 있는 세월호 참사. 청소년 독자들을 위해 토끼풀이 정리했다.

무리한 개조, 비극의 시작

2009년, ‘오하마나호’를 인천-제주 노선에서 주 3회 운항하고 있었던 청해진해운은 주 6회 운항을 위해 다른 배를 도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법령상 조건이 맞지 않았고, 매매 계약서와 사업 계획서를 조작했다. 승인을 맡은 인천항만청 관계자는 청해진해운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조작을 눈감아줬다. 청해진해운은 은행에서 110억 원을 대출받아 세월호를 구입하고 개조했다.

세월호의 개조는 ‘수익을 높이기 위해서’ 이뤄졌다. 여객과 화물 수송량을 늘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않았다. 선미(배 뒤쪽)에 비정상적으로 많은 구조물이 추가됐다. 무게중심이 과하게 뒤쪽으로 잡혀 배가 정상적으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 세월호가 균형을 잡고 뜨기 위해서는 앞쪽에 ‘평형수’를 대량으로 실어 무게중심을 가운데로 옮겨야 했다. 본래 목적이었던 여객과 화물 수송량 증대도 되지 않았다. 화물 적재량은 반토막 났고, 여객 수송량은 고작 14% 증가했다.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아야 할 검사 기관 ‘한국선급’은 고가의 접대를 받고 이를 눈감아줬다.

배가 불안정해졌다면 사고가 발생하지 않게 운항 관리라도 잘 돼야 하지만 운항 관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운항 관리를 책임지는 한국선급의 직원들은 ‘운항관리규정’을 만들기 위한 시험 운항 당시 제주도에서 먹고 마시며 놀았다. 세월호의 운항관리규정은 엉터리였다. 청해진해운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화물 적재량을 5배 가까이 부풀렸다.

세월호는 태생적으로 안전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3년 3월 운항을 시작한 세월호는 언젠가는 사고가 터질 ‘폭탄’이었다.

개조된 세월호.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어떻게 침몰했고 왜 그렇게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나

세월호는 2014년 4월 15일 오후, 인천항에서 출항하는 과정부터 삐걱댔다. 안개가 너무 심해 출항할 수 없었는데, 화물 수익이 아까워 안개가 걷히기를 3시간가량 기다렸다. 결국 안개는 일부 걷혔고, 세월호는 밤 9시경 인천항을 떠났다. 청해진해운은 ‘항상 하던 대로’ 화물 적재 서류를 조작했다. 당시 화물은 최대 적재량의 2배가 넘게 실렸던 것으로 보인다.

8시 48분경, 남해 병풍도 옆을 지나고 있던 세월호는 방향을 오른쪽으로 5도가량 틀었다. 방향 전환을 멈췄지만, 뱃머리는 오른쪽으로 점점 빨리 돌아갔다. 과적한 화물이 갑판에서 일부 바다로 떨어졌다. 화물 무게가 한쪽으로 쏠린 세월호는 왼쪽으로 더 기울었다. 8시 49분, 세월호의 기울기는 약 46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호가 기울었을 때, 배에서 아침을 보내던 승객들은 깜짝 놀랐다. 가구가 미끄러지고 매점에서 온수가 쏟아지면서 다치기도 했다. 배가 기울고 3분 정도 지나 119에 첫 신고가 접수됐다. 단원고등학교 학생이었다. 구조에 필요한 핵심 정보를 다 말했지만, 119 상황실과 해양경찰 간의 정보 공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구조 지연과 미비에 영향을 줬다.

세월호를 운항하던 청해진해운은 배가 기울어 곧 침몰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과적했던 화물량을 조작했다. “승객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월호 내부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이 방송됐다.

한편 해양경찰이 주위의 선박들에게 세월호에 가까이 가서 구조를 도우라고 전했다. 해양경찰도 출동했다. 세월호에 가장 가까이 있던 유조선인 ‘두라에이스호’의 선장은 세월호와의 무전에서 “탈출을 시키십시오, 빨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해양경찰은 승객 탈출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구조를 위한 선박들이 도착하자 세월호 선원들은 재빨리 도망쳤다. 해양경찰은 선원들만 구조했고, 세월호 내부로 진입해 ‘가만히’ 있던 승객들을 구조하지 않았다. 세월호 내부에 바닷물이 들어오자 바다로 뛰어내린 일부 승객들은 해양경찰 구명보트로 헤엄쳐 갔다가 해양경찰로부터 욕설을 듣기도 했다.

헬리콥터도 도착했다. 하지만 헬리콥터는 승객 구조에 한계가 있었다. 바구니를 내려서 한 명씩 구조해야 했다. 결국 10시 30분, 마지막 생존자가 구조되고 세월호는 뒤집혔다. 배가 기울어진 지 101분 만이었다. 핼리콥터 3대가 총 31명을 구조했고, 해양경찰은 83명을 구조했다. 민간 어선들은 58명을 구조해 총 172명이 구조됐다. 304명이 희생됐다.

세월호가 침몰한 뒤 밤에도 조명탄을 쏘며 승객 구조에 힘을 쏟고 있다. 한겨레

그날의 세월호는 왜 침몰했을까

세월호는 왜 침몰했을까.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내인설’과 ‘잠수함 충돌설’ 두 개의 가설을 두고 갈등하고 있다. ‘내인설’은 세월호가 과도한 개조와 화물 과적, 화물 고정의 미비로 인해 침몰했다는 가설이고, ‘잠수함 충돌설’은 잠수함이 세월호에 충돌해 침몰하게 했다는 가설이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의 세월호 기록팀에서 발간한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은 ‘잠수함 충돌설’에 대해 “세월호를 침몰시킨 잠수함은 오직 상상의 세계에서 존재했을 뿐 컴퓨터가 가상으로 만들어낼 수조차 없는 모순덩어리”라고 서술한다. 잠수함 충돌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구와 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대한조선학회에서는 잠수함 충돌설에 대해 “신뢰하기 어렵다”며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했고,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은 “내부적 요인만으로 세월호의 충돌을 설명할 수 있다”는 논문도 냈다.

그렇다면 신빙성 있는 주장은 ‘내인설’이다. 왜 신빙성 있을까.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은 ‘복원성’이 문제였다고 분석한다. 사고 당시 세월호에는 최대 화물 적재량의 2배를 넘기는 양의 화물이 실려 있었고, 선박이 흔들릴 때를 대비한 고정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화물의 무게를 늘리면서 선박의 균형을 잡기 위해 필요한 ‘평형수’도 덜 채웠다. 이런 방식으로 화물을 실으면 무게중심이 상당히 올라간다. 결국 세월호는 처음 46도가량 기울어진 뒤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복원성’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는 세월호가 당시 “출항하지 말았어야 할 배”였다고 결론 내렸다.

왜 구조하지 못했나

세월호 참사는 침몰하고 있던 배 안에서 ‘가만히’ 있던 승객들을 구조하지 못해서 악화됐다. 선장과 선원이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해경이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선장과 선원은 법적으로 승객의 안전을 위해 각종 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세월호의 선원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한 뒤 도망쳤다. 실제로 세월호 선장 이준석은 살인죄 혐의를 적용받아 무기징역을 선고받기도 했다.

해양경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최초 신고 이후 정보 파악도 못했고, 세월호가 있던 해역의 관제를 맡은 ‘진도VTS’도 임무를 다하지 않았다. 선장이 도망쳤음에도 선장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구조에 필요한 협조도 하지 않았다. 해경 본청 상황실에서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지휘부가 제대로 된 보고를 받지 못하고 ‘사진과 영상’에만 집착하는 등 지휘 체계가 없었고, 전반적으로 우왕좌왕했다.

승객을 먼저 배 밖으로 내보냈어야 하는데, 선원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전파한 뒤 도망쳤고, 해경에서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다. 승객은 안중에 없었다. 오히려 “진작 구조해서 ‘그림’이 됐어야 한다”라고 대외적으로 보이는 것만 강조했다. “승객을 내보내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처음 현장으로 출동한 해경 123정은 승객 구조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주한 선장과 선원을 먼저 구조했다. 대부분의 구조는 현장에 달려간 어선들과 행정선이 도맡았다. 123정은 “뛰어내리라고 고함을 치거나 마이크를 이용해서 방송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음에도 세월호 승객들이 배 밖으로 나오게 하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123정의 선장은 실형을 선고받았고, 문제가 드러난 해경은 해체됐다.

언론 보도도 문제였다. 출처가 불명확한 소식통의 말만 듣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보고를 계속했지만 회사는 무시했다. ‘학생 전원 구조’라는 가짜 소식은 단원고등학교에서 시작되어 기자들에게 퍼졌고, 언론 보도를 본 경찰은 ‘전원 구조’라고 윗선에 알렸다. 경찰의 발표를 접한 기자들은 다시 잘못된 기사와 속보를 냈다. 오보의 악순환이었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는 현장에서의 구조를 더욱 어렵게 했다.

세월호 참사 11주기를 앞둔 단원고등학교의 모습. 문성호 기자

잊지 말아야 할 세월호 참사

세월호 참사는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11년이라는 시간은 누군가에겐 짧고, 누군가에겐 긴 시간이다.

우리에게도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실제로 지난 2022년 이태원 참사부터 작년 말의 무안공항 참사와 같이 대형 사고는 지금도 일어난다. 세월호 참사에서 어른들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희생됐는지 기억하지 않으면 미래에도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세월호 침몰과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최소한 304명의 희생자는 내면 안 된다. 선원들이, 해경이, 어른들이 잘 대처하면 무고한 학생들의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잊혀지는 세월호 참사, 올해 4월 16일로 11주기가 됐다. 세월호 참사는 반복되면 안 된다. 잊혀져서도 안 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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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호